2024. 10. 16. 12:10ㆍ카테고리 없음
며칠동안 계속 요일4:16을 암송하면서 묵상했다. 자기 전에 이 구절을 곰곰히 묵상하다 잠이 안 와서 날밤을 새기도했다. 처음에는 한 단어 한 단어에 머물면서 묵상하는데 너무나 좋았다.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지는 것 같았다. 진짜 그분 옆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첫 구절에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라는 말이 나온다. 초대교회 사람들은 성경도 없었다. 체계화된 기독교 교리나 지식도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사랑을 알았을까?

지금 우리는 성경에 이런 말이 나오고 목사님이나 기독교서적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 십자가에서 그 사랑을 보였주셨다'라는 이야기를 통해서 알고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 사람의 입장이 돼 보았다. 그렇게 현자였고, 사랑이 많았고, 표적과 기사를 베푸는 랍비인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는 것과 그가 부활했다는 것을 보거나 들었다고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러면 그들은 대체 어떻게 그 사랑을 알게 되었고 믿게 되었을까?
사랑을 알 수 있는 길은 분명 단순하지만 '성령'의 역사뿐이다. 베드로가 수 천명 앞에서 '너희가 십자가에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셨고 그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다!'라고 설교했다. 이렇게 설교했다고 그들이 회개할 수 있는가? 아니다! 성령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이 사실로 들리게 해 주셔야 한다. 그 삼 천명에게 성령께서 이 말씀이 실제로 들리게 해 주셨다. 그 때 그들은 '어찌할꼬!'라며 가슴을 치고 회개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님을 죽인 자 임을 알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탄식이 나온 것이다. 성령께서 이것을 가능케 해 주셨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려면 십자가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이 있다. '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그 죄의 삯'이 뭔지 알아야 한다. 그 죄의 삯이 '영원한 죽음'이라는 사형을 앞두고 있는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그 값을 치르셨음이 분명하게 연결되어야 '사랑'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진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임을 알 수 있다. 나에게는 '죄'가, '그 죄의 삯'이 교리인가 아니면 실제인가?
하나님이 보시는 죄 - 피조물인 내가 하나님의 왕의 자리를 빼앗아 꿰차고 내 맘대로 살아온 죄 그리고 피조물인 주제에 창조주를 마음대로 이용하고 싶어하는 죄 -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 비춰지는 이 죄가 하나님의 모든 분노를 쏟아부어도 풀리지 않는 얼마나 큰 죄인지 알아야 십자가가 사랑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 죄에 대한 삯이 '영원한 죽음' - 지옥 - 임이 선명해야 그 사랑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댓가를 그 죽음 앞에 서 있는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그 값을 치러주셨다는 것이 분명해야 그 사랑을 알 수 있다.

어제 자기 전에 묵상하면서 참 많은 것을 생각했는데 그 중에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죽으신 것을 실제적인 예로 생각해 보았다. 몇 가지를 생각해 보았는데 먼저, 내가 고질적인 심장병으로 치료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심장 이식'밖에 없는 상태인데 누군가가 자신의 심장을 빼어서 내게 양보를 하고 자신은 죽었다. 그리고 그 심장을 내게 이식해서 내가 생명을 다시 이어 받아 살게 됐다. 그렇다면 내가 그 사람에게 느끼는 감정이 어떨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저 일평생 감사 감사와 사랑뿐일 것이다. 그런데 정말 이런 마음이 예수님을 향해 드는가? 그것보다 더 한 사랑과 마음이 드는 게 정상적인 반응인데 사실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이 지식이라는 말이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보자. 물가에서 수영을 하고 놀다가 조금 깊은 곳으로 가서 헤엄치다 빠져 죽어가는 나를 보고 지나가던 사람이 나를 구해주려고 물로 뛰어 들었다. 겨우 나를 살려냈지만 그 사람은 지쳐서 물에서 나오지 못하고 죽고 말았다. 그렇다면 그 사람을 향한 나의 마음은 어떨까? 너무 미안하고 감사하고 평생을 기억하고 평생을 감사하고 살아도 부족할 것이다. 아마 그 가족에게 사례를 해도 부족할 지경일 것이다.
마지막 예로 내가 길을 건너던 도중 신호를 어기로 덤프트럭이 내게로 달려오고 있다. 2초 후면 그 트럭에 치어 죽을 운명인 나를 그 장면을 목격하던 사람이 나를 밀어 버리고 자기가 치어 죽었다면 그 장면을 내가 지켜보았다면 어땠을까? 앞에 예를 든 심장을 주고 죽은 사람, 물에서 나를 구해주고 죽은 사람에 대한 마음과 동일한 감사가 평생 그 사람을 향해 멈추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그 사람의 목숨을 대신해서 내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살리신 하나님의 사랑, 십자가에 죽어 나를 대신해서 나를 살리신 예수님의 사랑을 알려면 '죄'을 알아야 한다. '죄의 삯'이 얼마나 무서운지를 알아야 한다. 위에서 예를 든 것처럼 내가 죽어야 마땅한데 나를 '대신해서' 예수님이 그 값을 대신 담당해서 나의 죽음을 떠 안으신 것을 알아야 그분의 사랑을 알 수 있다. 이 '죄, 죄의 삯, 대신해서'는 말로, 설교로 알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성령께서 알려주시고 깨닫게 해 주셔야 하는 것이다. 이 앎이 교리와 지식이 되지 않고 진정한 앎이 되려면, 초대교회 사람들처럼 그 사랑을 알고 믿으려면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셔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성령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시는가? 몇 번 앞에서 언급했지만 오직 그분만이 이것을 가능케 하시는 분임을 알고, 그리고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가르쳐주시고 모든 것을 실제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만을 의뢰하고 기대하며 그분께 나아가 간구하며 기다리는 것이다. 그것밖에는 없다.

고후 5:14절을 암송해 보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위해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다. 이 구절을 읽다가 '대신'이라는 말이 너무 뻔한 의미이지만 궁금해서 사전적 의미를 찾아 보았다.
'어떤 대상의 자리나 구실을 바꾸어서 그 책임 등을 떠 맡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님이 나의 죽음을 떠맡으셨다. 예수님이 나의 저주를 떠맡으셨다. 예수님이 나의 모욕과 수치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를 모두 떠 안으셨다. 예수님이 나 대신 지옥을 떠안으셨다. 십자가에서 지옥을 경험하셨다.

나는 하나님이 보시는 '죄'를 정말 아는가? 교리와 지식으로 아는 것은 아닌가? 그 '죄의 삯'인 영원한 죽음, 지옥이 얼마나 무서운지 아는가? 정말 이 '죄'에 대한 '값'을 '나대신' 정말 예수님이 '나대신' 치르셨다는 것을 지적동의가 아니라, 교리와 지식이 아니라 진짜로 아는가? 성경에 나와서 목사님이 그렇게 설교하셔서가 아니라 성령님이 내게 알려주신 것인가? 이 문제를 우리는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되지 않으면 하나님의 사랑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그것도 지적동의와 교리와 지식으로 끝나서 그분과 함께 사는 것이 되지 않고 그냥 그분을 이용만해서 이 세상에서 어떻게든 편하게 잘 살아 볼 궁리만하게 된다.
성령님, 이제는 더 이상 지적동의를 믿음으로 착각하며 살 수 없습니다. 지식과 교리의 신앙을 진짜인양 살아갈 수 없습니다. 인생이 짧습니다. 오늘이 마지막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요일4:16에 '사랑을 알고 믿었노니'라고 했듯이 저도 이 사랑을 믿고 아는 것이 아니라 알고 믿기 원합니다. 이 사랑을 알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는데 십자가를 본다고 사랑을 알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이 보시는 '죄'가 무엇인지, 그 '죄의 삯'이 얼마나 엄중한 것인지, 그 죄의 삯을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서' 떠맡으셨다는 것이 실제가 되어야만 사랑을 알고 믿을 수 있습니다. 성령님, 오직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하시는 당신을 의뢰하고 기대하며 엎드리오니 알려주시옵소서! 그래서 그 '사랑을 알고 믿는' 자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사랑을 알기에 예수님과 매일 함께하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자되게 하여 주소서!
아멘 아멘 아멘